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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과 파옥" 나이지리아 활동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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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댓글 0Count 조회 115View 작성일 24-09-1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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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북부 보르노를 갈 때가 가장 무서웠다. 범죄 테러 반군 원리주의 단체 등으로 인한 학살 때문에 난민들이 발생하는 곳이다. 강습하러 가면서도 난민촌을 지나간 바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간 이유는 하나였다. 더 메마르고 가난한 곳을 가기 위해서

 

사실 사막화와 황폐한 땅의 대명사는 사헬이다. 이번 출장에 기필코 사헬을 가려고 아프리카 내외의 70여 단체를 접촉했지만 한 군데가 어렵다는 답이 오고, 한 군데는 담당자가 휴가 갔으니 나중에 연락하자더니 어렵다는 답이 오고 그외에는 대꾸조차 없었다. 절박한 민중을 대변한다는 민중의 운동세력은 절박하지 않았다. 부유한 선진국 기구들 원조를 받으면서 자기 백성 빈곤을 팔아먹는 귀족이 되어 정신까지 썩어버린 것이냐? 내가 큰 돈을 가지고 온다고 했으면 대뜸 답장이 왔겠지. 난 송신할 때마다 돈은 우리 정신을 썩게 한다. 민중 연대의 정신으로 협업하자라고 했으니 답이 안 왔나보다.

 

사헬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왕 가기로 돼있던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척박한 북부(사헬 인근) 땅을 고른 것이 보르노였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놀랍게도 보르노는 온통 푸르렀다! 우리가 한참 비오는 철, 우기 한 가운데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덕에 광야를 달리는 먹구름이 어떻게 지평선을 출발하여 폭포 같은 빗줄기를 떨구며 대지를 후들기다가 내가 선 곳까지 덮쳐오는지 구경하는 영광을, 사헬의 비에 온몸 흠뻑 젖는 귀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건기가 오면 푸르름은 순식간에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갈색 건초로 변한다.

 

보르노 사람들은 적극성과 의욕이 넘쳤다. 무수한 농민 강습을 다녔지만 이 정도로 열렬하게 호응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원조병이 덜 들어왔는가?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가? 아무튼 긍정적 신호였다.

 

보르노에서 우리와 연결된 조직은 나이지리아 농민협회(AFAN)와 여성소농협회(SWOFON)였다. 농민 대상 첫 강습이 끝나자 이분들은 자기 조직 간부들을 소집해서 우리더러 다시 강의해줄 것을, 특히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를 말해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반응이 와야 우리도 신나서 일을 하지!

 

나는 식민주의의 세 가지 형태를 얘기했다. 총을 들고 들어오면 우리는 목숨이 두려워 존엄을 버린다. 총의 시대가 지난 것은 결코 아니나 여러 면에서 발톱을 숨겼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들고 들어오면 우리는 돈을 쫓느라 존엄을 잃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찬란한 돈의 시대, 돈이 있으면 할 수 없음이 없고, 돈이 없으면 할 수 있음이 없다. 곰곰히 돌아보면 우리는 돈이 좋아서돈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리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총과 돈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이나 셋째가 가장 극악하다. 그것은 부패. 정신을 썩게 만드는 것이다. 부패가 스물스물 들어오면 우리는 정신이 썩은 것이 정상이라 여기고 존엄을 버린다. 그 사람은 원래 존엄이 없던 것처럼 된다. 부패의 씨앗이 싹튼 마음 속에서는 정의와 애민, 혁명과 이상이 가장 먼저 빛을 잃는다.

 

왜 민중은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총칼이 짓밟고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대자본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설득이 된다. 총이 없고 돈이 없는 자가 저항의 들불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저항의 불씨가 정말 절망적으로 소등되는 것은 마음 속의 저항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정신이 썩어버리는 순간이다.

 

소떼를 빼앗기고, 땅을 빼앗기고, 천연자원을 빼앗기고, 심지어 형제 자매들의 인신을 빼앗겨 노예적 노동에 팔려갈 수도 있다. (나라가 민중을 대변했던 한에 비극이겠지만) 나라를 빼앗길 수도 있다. 하지만 산물과 토지와 자원과 신체 결정권과 국가는 모두 찾아올 수 있다. 쉽지 않겠지만 되찾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신을 빼앗긴 민족은 정신을 되찾을 희망이 없다.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빼앗긴 그 무엇도 찾아오지 못하며, 되찾을 의지와 당위를 망각한 좀비가 된다. 왜 빼앗겼는지는 더 알 수 없다. 모르니 되찾아올 의지가 없고, 알아도 부역할 마음밖에 내지 않는다.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는 것이 지성이고, 되찾을 마음을 내는 것이 정의이며, 연대하고 행동하는 것이 용기다. 우리는 삼덕을 갖추었는가?

 

과거에는 빼앗아 감으로써 빼앗아 갔는데 이제는 주면서 빼앗아 간다. 두 눈 앞에 벌어지는 모순의 현장에 늘상 혀를 내두르며 착취의 교묘함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음에 감탄인지 한탄인지 내뱉는다. 돈을 주고 돈을 꿔주면서 부를 모두 가져갈 수 있는 메커니즘은 나라와 정부와 관료와 기업과 노동자와 농민과 인민이 모조리 부패했기 때문이며, 바로 그 돈이 부패의 핵심적 원인이 된다.

 

우리 프로젝트를 도와주던 한 어르신이 있었다. 나이지리아 사람이고 당연히 나이지리아에서 평생 살아온 분이다. 충격적 소식을 들었다. 석달 전이다. 그분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 상태에서 납치를 당했다. 무장한 젊은이들에게 이틀간 감금되었다. 이분은 돈을 줄테니 나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빌었는데 결국 발목에 총을 맞고 등에는 칼을 맞았다. 송금이 확인되자 풀려났고 천만에 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치안이 험악해진다는 것. 착잡하고 슬픈 일이다. 강도 짓은 누가 뭐래도 죄악이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전역에 스물스물 번지고 있고 깊어지고 있는 가난의 그늘을 생각한다면, 희망과 자긍을 잃은 청년들이 절박함에서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편 범죄를 용인할 수 없으면서 한편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언제부터 우리는 돈이 없으면 안되는 상태가 되었을까? 이 청년들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서라도 얻고자 한 것은 돈이다. 돈 없이 살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노예 상태다. 돈에 생존을 의존하므로 돈의 노예다.

 

언제부터? 나이지리아, 아니 아프리카 대륙, 아니 아메리카도 아시아도, 더 과거에는 유럽도, 언제부터 민중들 하나하나 철저히 모조리 돈을 갈망하는 신세가, 비를 기다리는 사막의 들풀처럼 되었을까?

 

부언컨대, 돈의 노예가 되기 전에는 힘의 노예였으니 돈으로부터의 해방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우리 스스로 권력자, 주권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다. 권력이란 꼭 근대 국가와 등치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로 실질적(명목 형식이 아닌) 권력을 지닌 주체들을 뜻한다면, 오늘날에는 금융 군수 디지털 바이오 제약 등 초국적 자본세력, 이와 결탁한 국제 기구 및 국가 엘리트 등의 카르텔이 될 것이다. 진즉에 이 세상은 전통적 용례로서 국가란 단위보다는 초국적 엘리트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적합하다.

 

(금융 시스템)의 노예는 힘(권력 시스템)의 노예 위에 덧씌워진 또 하나의 층(layer)이다.

 

옛날로 갈수록 금융 시스템이 줄어들고 권력 시스템이 지배를 독점했을 것이고, 더 옛날로 가면 지배자가 없는 자립 자치의 세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옛날의 권력 시스템이 (무자비함이야 오늘날보다 덜할 것이 없겠지만) 물리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해 지구 곳곳에는 아마 중앙 권력 아래 놓인 영토보다 탈중앙 자치 아래 놓인 영역이 훨씬 컸을 것이다. 이른바 조미아(Zomia).

 

왜 사냥하고 농사 짓고 자립하던 경제 단위들이 시장에 편입되고 화폐금융에 종속되었을까? 돈이가져다주는 놀라운 편익과 사치가 유혹적이었던 것이 하나고(자발성), 이들의 자립적 생산 기반이 파괴 당하여 제국에 동참하지 않으면 생산(노동, )이 불가능해진 것이 둘이다(강제성).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아프리카 이야기는 정확히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우리 일반인들은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반이 없다. 생산 기반 혹 능력을 포기하거나 파괴 당한 자는 세계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는 것밖에는 생산할 방법이 없다. 무조건 생산 능력을 가진 단위에 취업해야만 사회적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 대가로 을 번다. 생산은 곧 주류적 화폐를 획득하는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 돈 버는 일이 아니면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첫째, 스스로 생산이 불가능하므로 취업 따위의 의존적 형태로밖에 생산하지 못하고, 둘째, 생산은 곧 (주류) 화폐를 버는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이라 할 수도 있고, 산업화 고도 분업 세계 시스템이라 부를 수도 있고, 관점에 따라 사람에 따라 칭송할 수도 있겠지만, 깊이 생각하면 바로 이 지점이 우리의 무기력과 우울의 근원이 되며, 존재적(생존) 취약성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스스로 생산하는 것은 한편 자립을 확보하므로 외부 영향으로부터의 상대적 안정을 뜻하기는 하지만, 주류 시스템 기준으로는 궁핍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점(자립 농사 지어서 핸드폰 사용료조차 낼 수 있을까?), 주류 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순간 물리적으로 제거 당할 위험에 상시 노출된다.

 

이것이 우리 운명의 현주소다.

 

돈은 부를 반영하는가? 돈이 부를 반영하는 한에는 돈을 버는 것이 어느 정도 명예로운 축부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치부(致富)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택한 자의 존엄이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돈이 부의 정직한 반영인 한에도 청빈의 덕목이 살아있을 수 있어야 하고, 돈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나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돈은 부를 반영하지 않는다. 부를 수탈하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이다. 돈은 금본위와 결별하여 하나의 종이 쪼가리, 이제는 심지어 하나의 디지털 숫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돈에서 어마어마한 권력이 쏟아져 나오고, 따라서 그 돈이 쏟아져나오는 곳이 권력의 핵이 된다. 거꾸로 말한다면 그 권력을 갖기 위해 돈(세계 금융 시스템)을 그리 설계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세상 어디를 간들 달러를 내밀면 사지 못하는 물건(이건 생명이건)이 없음은 달러 지배가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아무리 정의롭게 정글 속에서 민중을 위한 투쟁을 이어가는 단체가 있다 한들, CIA가 와서 두툼한 달러 뭉치 건네며 이러이런 부탁만 들어주면 돈 더 줄게. 무기도 대줄게. 니네 편도 들어줄게. 니가 싫어하는 걔네들 우리가 때려줄게. 같이 일하자라고 하면 어느 단체가 마다하겠는가? 달러 지배가 완성되면 정의도 매수 당하는 신세인 것을.

 

일부 진보 인사들 내에 달러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계적 기축통화에 대한 기대가 있는줄 아는데, 그 어떤 강대국 통화가 등장하든, 그것은 노예의 주인이 바뀌는 것뿐으로, 현재 중앙화된 세계 화폐 금융 시스템은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 시스템이 공고한 이상 민중 권력과는 거리가 멀다.

 

기성 화폐가 모조리 금융 노예화의 도구라면 무엇을 쓰잔 말인가? 화폐를 무엇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화폐를 요구할만한 새로운 경제 공동체가 생겨나야 한다. 그것은 소멸위기에 놓인 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경제를 일구어낸 개척자들의 공동체일 수도 있고, 디지털 반란을 꿈꾸며 비트코인의 탈중앙화에 기대를 건 혁명가들의 공동체일 수도 있고, 가다피의 구상처럼 달러와 프랑을 탈피한 범 아프리카 화폐로 연결된 국가간 공동체일 수도 있겠다.

 

기성 세력에 위협이 되면 제거 당한다는 관점에서 리비아 가다피는 참 가슴 아픈 사례가 되었는데, 절망적인 것은 대다수 사람들은 정의로운 서방이 자국민 학살하던 독재자 제거했다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더 절망적인 것은 진실을 알아낼 의지도 필요성도 능력도 상실한, 그 무지가 우리 자유에 대해 직격하는 타격에 대해조차 무지한 우리 지성의 현주소다.

 

리비아 경우 유엔 안보리가 먼저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한 무력 사용을 허가하는 결의를 내놓았고, 이에 호응해 나토가 리비아를 침공했다. 이는 국가 단위보다 또한 국가 간 동맹보다도 발전한 상위 단계의 움직임으로, 국제 기구를 얼굴로 내세워 움직이는 사실상 단일화 통합되어 가는 일종의 정부와 유사한 힘으로 파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WHO를 얼굴로 내세워 제약 보건 세력들이 코로나 계기로 온갖 사기와 폭력과 침습적 조치들을 시행할 때,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우리 몸 속에 투입할 때, 어느 국가가 초강력한 초국적 세계정부적 힘에 대항하여 찍소리 냈으며, 거짓을 꿰뚫어보고 국민을 지키겠다고 나선 주권 국가가 어디 있었는가?

 

이번 아프리카 행의 가장 큰 이유는 나이지리아 사업이 확대 기로에 있기 때문이었다. 주정부로부터 큰 땅을 빌렸고 이제 본격적 운영에 들어갈 차였다. 수만 명에 이르는 농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부를 증진케 하는(제국의 화폐로다가!) 터전이 확보되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야무진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지역 단위의 공동체 개발 모델이 주정부 차원으로 확대되고, 다시 일곱 개 주로 확대된 뒤에 나이지리아 전역으로 퍼지는 것이었다. 아프리카를 향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새로운 지역개발 모델도 꿈꾸고 있다. 기존 지역개발 구상과 결정적 차이는 민중의 손으로지역개발이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자립과 자치가 아니면 허상이다!

 

우리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오 순수히 민중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명시해왔으나, ‘이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돈 돈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이용해서, 권력이 없는 자는 권력을 가장해서 뇌물을 뜯어내려 했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는 오히려 쉽고, 이리 꼬으고 저리 비틀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여 결국 돈 줄 테니까 제발 살려줘란 말이 나오게 하려는 수작이다. 지저분한데(돈을 뜯고자 하므로) 비열하기까지(자기 입으로 말 안 하므로) 한 것이다.

 

부패 관리들의 수작을 접하며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용암 같은 분노였다. 이 새끼들은 민중이 굶주린데 호화 레스토랑을 즐기고, 헐벗은데 화려한 옷을 입으며, 가난에 가난에 쓰러지는데 고급 외제 차 타고 으시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빅맨이 되면 똘마니들이 생기고, 다시 부패의 향연으로 똘마니들 챙겨주면서 자기 세력 만들고, 그 세력으로 집권해서 또 더 크게 한 탕 해먹는 것, 그것은 마피아와 다르지 않다.

 

나는 농민들 속을 헤집고 다니느라 옷이라고는 전부 티셔츠에 질긴 바지 뿐이었다. 땀에 젖고 흙이 묻고 가시에 찢어지곤 한다. 때로 일정 상 예기치 못해 내 옷차림을 바꾸지 못하고(남방을 딱 한 벌 가져왔음) 관리들을 만나러 가면 이들은 하나같이 동그랗게 튀어나온 복부비만이 눈에 띄는데 뭔지 모를 번지르르한 옷감 입고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거드름을 피우며 나를 맞이한다. 한번은 예정에 없던 장관 면담이 생겨 반바지를 입고 갔다가 모 관료로부터 옷이 그게 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고등학교 때 머리 길다고 선도부 선생에게 맞던 기억이 나는 순간이었다.

 

공식 석상에 정장 차림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자리에 따라 적절한 옷차림이 있다. 나는 저기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고위 관리, 올라가려고 바둥거리는 하급 관리들이 과연 자기들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왜 자기들 권력이 정당한지, 무엇을 위해 권력이 존재하는지,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 하나 똑바로 해보고 마음 하나 똑바로 가져보았느냐를 묻는 것이다. 흙바닥에 쓰러져가는 농부나, 길바닥에 쓰러져가는 아이나, 팔려가 쓰러지는 여인의 고통이 마음 속에 걸린다면 너희들이 흙 묻은 옷을 멸시할 수가 있느냐, 너희들이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서 외국인과 뇌물 흥정할 때 태양으로 녹아내리는 아스팔트에 중국산 공산품 잔뜩 짊어지고 자동차마다 자동차마다 창문 두드리며 하루에 천 원을 벌어 아들 딸 먹이려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느냐, 너희들이 너희 이웃 형제 자매 엄마 아빠 삼촌 이모를 내리쳐서 피를 빨아먹고 그 머리를 밟고 올라가며 홀로 고위직이 되면 되는 것이냐, 올라가고 올라가면 더 크게 해쳐먹으려는 외에 무엇을 꿈꾸느냐, 이 개 새끼들아.

 

오해는 마시라. 부패한 인간들에 대한 경멸도 분명히 느꼈지만 역사의 흐름에 비춰보아 소각된 폐비닐 쓰레기 가루보다 허망하게 사라질 존재들에 대해서는 침 한번 탁 뱉어주고 무시할 수 있었다. ‘먼지가 되어란 노래도 있지 않던가. 오히려 분노의 본질은 인간의 삶을 이렇게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정신까지 노예로 개조한 시스템을 향한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도둑질이다. 그것은 원래 백성의 것이나 그들이 빼앗은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시도해도 성공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절망한다. 정녕 우리 세상은 감옥이었다. 민중은 탈옥을 꿈꾸지만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간수는 총칼을 들고 있을 뿐 아니라 돈까지 쥐고 있다. 죄수들은 간수가 지능적으로 배분한 돈을 가지고 어느 날엔가 돈의 주인이 될 날이 오리라, 돈의 주인이 되는 날 해방되리라 꿈꾸며 망상하며 오늘도 장사하고 사기치고 팔고 사면서 자본 놀이를 하지만, 하면 할수록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게임일 뿐이다. 죄수들이 돈놀이 도박에 정신 팔려 있을수록(그것도 이길 수 없는 게임으로서) 죄수들을 통제하기 쉬우며, 죄수들이 탈옥의 꿈을 접고 정신이 썩어갈수록 죄수는 자발적 죄수가 되어간다.

 

그들의 게임을 하는 순간 패배 뿐이다. 그들의 카드를 놀아주는 순간 먹힐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의 경기장에서 우승자가 되려 하지마라.

 

더 이상 탈옥을 꿈꾸지 마라. 이제는 파옥이다! 破獄

 

모두 같이 감옥을 부숴버리자! 나 하나 탈출하기를 꿈꾸지 마라. 함성에 무너진 철창을 밟고 간수와 간부들이 탈출케 하라!

 

감옥을 나가려 하지마라. 감옥은 우리 부패한 정신 속에 구축된 허상이다. 마음의 상을 놓으면 감옥은 환영처럼 이슬처럼 사라진다. 없는 감옥인데 무얼 나가겠는가!

 

우리가 있던 감옥이 곧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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